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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그 위선의 역사
저자: 커스틴 셀라스, 오승훈 | 출판사: 은행나무 | 간행일: 2003년 5월
분야: 사회/정치/법 | 쪽수: 457쪽 | 정가: 14,000원
2008년 09월 24일 13시 09분
추천 : 1     조회 : 364
글쓴이: 신선
인권을 위한 전쟁

이라크 전쟁이 끝났다. 거대한 폐허와 광기어린 공황과 겹겹이 쌓인 시체를 남기고 마침내 전쟁은 끝이 났다. 이 전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 이라크 전쟁은 인권을 명분으로 내세운 전쟁이었다. 3월 20일 부시 대통령은 개전 연설에서 전쟁의 명분을 ‘이라크 해방’(Iraqi Freedom)으로 선언했다. 그게 작전명이 되었다. 부시는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키고, 세계를 죽음의 공포에서 구하기 위해” 무법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테러 지원과 대량살상 무기 보유, 이 의심스런 혐의에다 부시는 민주정권 수립이라는 대의를 보탰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테러 보복 전쟁이 이라크에 이르러 완벽한 ‘인권 프로그램’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부시는 대국민 연설과 기자회견 때마다 후세인의 생화학 무기 사용 전력을 거론했다. 그는 “더 이상 야만정권에 자비를 구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부시의 파트너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은 3월 28일 영미 정상회담을 가진 뒤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 전쟁에 회의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도 이해한다.…그러나 한 가지 통계자료만 언급하겠다. 지난 5년간 이라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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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위한 전쟁
이라크 전쟁이 끝났다. 거대한 폐허와 광기어린 공황과 겹겹이 쌓인 시체를 남기고 마침내 전쟁은 끝이 났다. 이 전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 이라크 전쟁은 인권을 명분으로 내세운 전쟁이었다. 3월 20일 부시 대통령은 개전 연설에서 전쟁의 명분을 ‘이라크 해방’(Iraqi Freedom)으로 선언했다. 그게 작전명이 되었다. 부시는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키고, 세계를 죽음의 공포에서 구하기 위해” 무법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테러 지원과 대량살상 무기 보유, 이 의심스런 혐의에다 부시는 민주정권 수립이라는 대의를 보탰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테러 보복 전쟁이 이라크에 이르러 완벽한 ‘인권 프로그램’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부시는 대국민 연설과 기자회견 때마다 후세인의 생화학 무기 사용 전력을 거론했다. 그는 “더 이상 야만정권에 자비를 구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부시의 파트너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은 3월 28일 영미 정상회담을 가진 뒤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 전쟁에 회의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도 이해한다.…그러나 한 가지 통계자료만 언급하겠다. 지난 5년간 이라크에서 다섯 살 이하의 어린아이 40만 명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었다. 막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들을 보살펴야 할 현 정권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전쟁을 하는 이유다.”

누가 보아도 이라크 땅에 인간존엄의 가치를 세우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 유엔은 동의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른 전쟁만을 인정한 유엔 헌장을 어겼다. 국제규범을 무시한 나라가 되었다. 그렇게 ‘나쁜 전쟁’이었음에도, 어떻게 미국은 침공을 강행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도덕과 명분을 무시하는 ‘무법정권’이고, 그게 최강자의 ‘힘의 논리’라고? 너무 단순한 대답이다. 그 논법에는 약자의 대항논리를 찾을 수 없다. 일방주의와 신제국주의론으로도 부족하다. 뭔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인권을 방패로 삼은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인권― 신으로부터는 먼 , 정치와는 가까운
인권은 인간의 문명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아니,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저 옛날 오이디푸스의 딸 엘렉트라가 폭군 크레온을 향해 “저 하늘에 기록된 영원히 멸하지 않는 신의 법 앞에 당신의 힘은 아무것도 아니오!”라고 외쳤을 때, 그 신은 인간에게 어떤 권리도 허락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천부인권(天賦人權)은 없었다. 신은 인간에게 인권을 주지 않았다. 사실, 인권은 개인의 자유에 눈을 뜨기 시작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발명품이었다. 그리고 그 인권은 ‘세계인권선언’이 제창된 1945년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회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계역사 속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세계인권선언’을 둘러싸고 미국은 자신이 원하는 문구를 집어넣기 위해 서슴없이 흥정을 하고 모략을 꾸몄다. 그리고 선언이 어떠한 구속력과 강제력도 갖지 못하도록 앞장서서 훼방을 놓은 것도 미국이었다. 세계인권의 심장 유엔 인권위원회는 시작부터 미국의 독무대였다. 인권위원회를 이끈 ‘인권의 대모’ 엘리너 루스벨트는 미 국무부의 외교노선에서 한치도 어긋남이 없었던 철두철미한 냉전주의자였다.

전후 세계정의를 바로세운 인류양심의 위대한 업적으로 칭송받아온 뉘른베르크와 도쿄 전범재판은 어떠한가. 법정은 홀로코스트와 침략전쟁의 위법을 꾸짖었지만, 드레스덴과 히로시마의 살육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렸다. 전범재판소는 처음부터 오로지 패전한 적군의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도쿄 전범재판의 연합국측 소추위원장 조지프 키넌은 재판 첫머리에 이렇게 단언했다. “우리는 연합국이 히로시마를 폭격한 것에 대해 사과할 수 없습니다. 이는 선량한 시민이 무법자로부터 가족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했다면, 결코 사과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선택받은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정의였다.

정치는 어떻게 인권을 이용했는가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지미 카터 역시 대통령 재임 시절 베트남전 후유증과 경기침체를 돌파하기 위해 인권 캠페인을 벌였고, 인권을 수호한다는 미명 아래 제3세계 국가들의 주권을 멋대로 침해했다. 그는 왜 인권을 선택했을까? 인권은 보수와 진보 모두가 공감하는 최고선이자, 갈등과 분열로 만신창이가 된 미국을 하나로 엮어줄 국민통합의 열쇠였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인권에 돌을 던질 수 있으랴? 그러나 그 이면엔 더욱더 중요한 이유가 숨어 있었다. 전후 세계질서를 지탱해온 서구 이데올로기인 반공산주의가 시들해진 1970년대 데탕트 시절, 인권은 바로 미국 정부에게 정치적·도덕적 이니셔티브를 보장하는 가장 편리하고 안전한 대용물이었기 때문이다.

인권이 정치에 놀아난 사례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1991년 걸프전을 앞두고 조지 부시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라크군이 쿠웨이트 병원 신생아실에 난입해 인큐베이터를 약탈해가는 바람에 수십 명의 아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떠벌렸다. 미국의 무력개입을 합리화하고 여론의 동의를 모으기 위한 교묘한 선전전이었다. 역설적인 것은 이 헛소문을 퍼뜨린 주인공이 다름 아닌 평화와 양심의 상징인 앰네스티였다는 사실이다.

인권은 국경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탈정치시대의 종교이다. 인권 대통령을 자임했던 클린턴 행정부 시절, 기득권 사수에 나선 보수진영은 극우 복음주의 개신교도들과 손을 잡고 참혹한 내전에 시달리고 있던 아프리카의 버림받은 땅 수단을 타깃으로 대대적인 노예해방 운동에 나선다. 기실, 수단 주민들을 괴롭히던 공포 중에서도 노예제도는 지극히 사소한 문제였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굳이 수단에게서 노예의 멍에만을 벗겨주려 애썼을까? 그것은 미국인들 자신의 민감한 감정선을 건드리는 핫이슈이며, 흑인이라는 구체적인 지지자들의 강력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아젠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땅에서 족쇄에 묶인 수단의 노예들은 이 미국을 휘저은 떠들썩한 헛소동이 끝난 후 곧 망각의 늪으로 버려졌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세계열강의 굴절된 의식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인권 캠페인이 왜 그토록 변덕스러운지 잘 알 수 있다. 해외 인권탄압의 희생자들은 열강이 그들 정부에 간섭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희생자들을 위한 간섭이 아니다. 희생자들은 인권 캠페인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하다면 희생시켜도 좋은 존재이다. 그렇게 잊혀져버린 희생자들의 명단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러시아 유대인, 니카라과 인디언, 티베트 수녀, 폴란드 노동조합, 코소보의 성폭행 피해자, 중국의 반체제인사, 이라크 내 쿠르드족, 르완다 투치족 난민…. 대통령과 수상, 자본가와 구호단체, 외국 특파원과 종군기자, 팝스타와 모델 모두가 불의의 현장으로 구름같이 몰려간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가 다른 곳으로 옮아가면 희생자들은 또다시 어둠 속에 묻혀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도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인권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이처럼 <<인권, 그 위선의 역사>>는 유엔의 창설과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벌어진 두 전범재판에서부터 시작해 냉전과 탈냉전을 거쳐 유고슬라비아 전범재판 그리고 테러와 복수로 점철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인권사를 국제정치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살펴본 ‘9부작 다큐멘터리’다. 저자는 인권을 이용해 약자들을 제압하고 정치적 이득을 챙긴 강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권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할 때 거꾸로 얼마나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경고한다.

그러나 인권정책을 간단히 정부사기극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 그 속에는 더 복잡하고, 덜 계산적인 뭔가가 작용하고 있다. 서방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정치 실리주의에 가로막힌 한계 속에서 인류의 가치와 미덕을 함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이 인간존엄과 정의에 대해 설교를 할 때는 그저 입에 발린 소리인 것만은 아니다. 사실, 오늘날 인권은 현대 정치담론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공용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과 테러의 공포가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지금, 인권만큼 모든 이들이 공감하는 도덕적 호소력을 지닌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라크의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주권국가를 침략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살상한 미국의 위선조차 인권의 추인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인권은 헤게모니에의 야욕에 불타는 지도자의 광기를 치장하는 황금 면류관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회세력들의 손쉬운 변명도 아니다. 정치로 하여금 인권을 말하게 하지 말라. 인권으로 하여금 인권을 말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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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소개
지은이 커스틴 셀라스 Kirsten Sellars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국제정치를 전공하고, 현재 런던에서 국제문제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가디언>>(Guardian), <<타임>>(Time),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 <<오스트레일리안>>(Australian), <뉴 스테이츠맨>>(New Statesman), <<스펙테이터>>(Spectator), <<에스콰이어>>(Esquire), <<보그>>(Vogue)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옮긴이 오승훈
1963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뒤, 문화일보 기자로 국회, 문화관광부, 노동부, 환경부 등을 출입했다. 현재 그는 미국 뉴저지 주 페어리 딕슨 대학교의 커뮤니케이션 스쿨에서 초청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문화간 커뮤니케이션(Intercultural Communication)의 입장에서 바라본 신문 및 방송의 국제 뉴스 왜곡”을 주제로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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